<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의심하는 도마)>, 1601 - 1602
불같은 성격, 폭력적이며 자유분방한 태도, 종잡을 수 없는 행동양식, 서른 아홉살 이라는 짧은 생에 동안 폭행, 기물파손, 불법 무기 소지, 살인 등 혐의로 15번이나 수사 기록에 이름을 올렸으며 감옥에 수감된 이력 7번,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계속된 탈옥시도.
앞서 나열한 이력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여러분은 그를 분명 험악한 범죄자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불명예 스러운 이력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등장할 바로크 미술의 거장인 루벤스, 램브탄트, 벨라스케스 등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그는 바로 '미켈란젤로 디 카라바지오' 입니다.
<The Supper at Emmaus (엠마오에서의 그리스도)>, 1600
미켈란젤로 디 카라바지오는 16세기 에서 17세기로의 전환 시점에 활동 하였던 초기 바로크 미술의 개척자 입니다. 그보다 더 앞선 시대에 활동 했던 미켈란젤로와 구분짓기 위하여 지어진 별명인 '카라바지오'는 밀라노 동쪽에 위치한 그의 부모의 고향 지역명 이기도 합니다. 가족들은 화가가 5살이 되던 해에 전염병을 피하여 카라바지오로 이주 하였는데, 이듬해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맙니다. 몇년 뒤에 어머니도 사망하자 그는 로마로 가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Young Sick Bacchus (병든 바쿠스)>, 1593 - 1594
카라바지오가 로마에 도착한 시기에 그린 그림 중 [병든 바쿠스] 에서는 화가 자신이 모델이 되었는데요, 그는 전형적인 화가의 자화상을 그린 대신에 그림속의 인물로 분장 하여 자주 등장 하였습니다. 이런 작업 방식은 20세기 말 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한 '분장자화상' 이며 카라바지오는 이러한 흐름의 선구자 이기도 하였습니다. 로마 신화 속에서 '와인의 신'으로 등장하는 인물인 바쿠스를 병든 인간으로 묘사한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가 초기에 그린 작품들 속에서는 그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인 명암의 강렬한 대조, 리얼리즘한 묘사 등은 크게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Bacchus (손톱에 때가 낀 바쿠스)>, 1597 - 1598
[병든 바쿠스] 다음으로 [손톱에 때가 낀 바쿠스] 라는 작품에서는 정물묘사, 공간배치, 인체표현 등에서 좀 더 발전된 기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597-1598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추기경 델 몬테의 저택에 거주하며 젊은 청년들을 주제로 한 작품들 중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병든 바쿠스]와 마찬가지로 그림 속 남성들은 자세나 표정에서 여성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는데요, 이에 대해 카라바지오의 성적 취향이 반영 되어 있다는 설과 반박 하는 설 두가지 주장이 모두 존재합니다.
<Calling of Saint Matthew (성 마태오의 소명)>, 1600
1599년에 카라바지오는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교회로부터 마테오 콘타렐리 추기경의 무덤이 안치된 콘타렐리의 채플 좌우 벽을 장식할 그림을 주문 받습니다. 로마로 온지 8년만인 카라바지오가 21살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주문으로 그린 그림인 [성 마태오의 소명]과 [성 마태의 순교]는 그가 종교 화가로써 명성을 떨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그가 로마를 떠나는 1606년까지 그의 최고 걸작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탄생하는 작품들에서는 강렬한 사실주의적 묘사들과 극단적 명암법이 눈에 띄는 특징으로 발견 됩니다. 자연적인 요소로써의 빛 보다는 드라마틱한 연출적 기교로써 택한 빛은 그의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강렬함을 더욱 잘 보여주게 됩니다. 중간 단계 없이 강렬한 빛을 투입 시키는 이러한 방식을 키아로스쿠로 라고 하는데, 이에 카라바지오가 보여준 새로운 방식으로써 테네브리즘 이라는 용어가 따로 붙게 됩니다.다. 당시 로마에 있던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내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La Mort de la Vierge (성모의죽음)>
카라바지오의 종교화는 항상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성 마태의 소명]에 얽힌 일화로 카라바지오 에게 그림을 주문한 교회 측에서 요청은 성령에게 영감을 받아 엄숙한 자세로 마태복음을 작성하는 마태의 모습이었지만, 카라바지오는 머리가 벗겨진 노인의 우스꽝스럽게 놀라는 표정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신 중심의 관념을 가진 기득권 세력이 장악하던 때라 그의 리얼리즘과 창의성은 늘 받아 들여지기 힘들었습니다.
위 작품은 [성모의 죽음] 인데, 그림을 의뢰한 교회로부터 거부를 당했습니다. 카라바지오는 마리아를 헝클어진 머리와 퉁퉁 불어있는 몸, 겉옷 밖으로 힘 없이 빠져나와 있는 다리로 완전한 인간으로 묘사 하였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모델로 그려진 여성이 물에 빠져 죽은 매춘부로 쓰인 설들은 이 논란을 더욱 증폭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보르게세 추기경이 교황에 오르자, 당시 로마에 있던 모든 화가 중 처음으로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화가 또한 카라바지오 인데요. 교황은 그에게 그림에 신성함이 없고, 당신에게도 신성한 영혼이 깃들어 있지 않다는 얘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처럼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이며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Sacrifice of Isaac (이삭의 희생)>, 1594 - 1596
[성모의 죽음]을 그린 후 그는 특히 더욱 많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1605년에 내기로 한 테니스 경기에서 시작된 말싸움으로 상대방을 칼로 찔러 죽이게 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도망자의 신세가 됩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그린 그의 그림들 에서는 붓질이 굉장히 빠르고 간략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도망 다니는 곳에서 환대를 받아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려주다가 갖가지 사건에 휘말려 살아 오다 결국 감옥에서 출소한 뒤 로마로 가던중 열병에 걸려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39살때의 일입니다. 현재 그의 시신은 공동묘지에 묘비도 없이 묻혀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1609 - 1610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은 카라바지오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는 그림 입니다. 성서에서는 다윗은 선한 승리자, 골리앗은 악한 패배자로 묘사 되는데 이 그림에서는 골리앗이 다윗에게 무자비하게 참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입니다. 미술 사학자들은 이 그림에서 슬픈 얼굴의 다윗은 카라바지오의 젊은 시절 모습이고, 머리가 잘린 골리앗은 늙은 카라바지오 자신의 자화상 이라고 해석합니다. 한평생 집도 가정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전전하며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던 화가 자신은 잠을 청할때도 늘 신발을 신고 잘 정도였다고 합니다. 폭력과 살인으로 인한 죄책감 속에 본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싶었던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 께서 '세상은 불공평하기 때문에 공평한거다.'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을 몇년간 이해해 보려고 노력 하다가 최근 들어 균형에 관해 깨달으며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 했습니다. 카라바지오의 그림속에 있는 강렬한 명암의 대조를 보면서도 저는 인간의 본성과 선과 악의 균형에 관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악하다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이 세상에 '선'만이 존재 한다면 그것을 선이라고 생각할까요? 반대로 악만이 존재 한다고 해서 그것을 '악'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겠지요. 마찬가지로 선 뿐만이 아닌 이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악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더 선해 지려고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네요. 제 개인적 생각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며, 이번 포스팅은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모든 객관적 사실들은 위키백과와 네이버백과를 참조 하였습니다.